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레프 트로츠키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기타 == * 유대인 혈통이지만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의식은 눈곱만큼도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트로츠키는 [[내셔널리즘|민족주의]]를 경계했고,[* 정확히 말하면 처음 연방이 결성될 때 러시아 내부로 연방 국가들을 편입하려는 러시아의 민족주의적 성향에는 대응하고, 연방 내의 국가들을 존중해야하고 그들이 러시아로부터 오랜 시간 받아온 차별을 이해해야한다는 레닌과 견해가 일치했다.] 공산주의 사회가 완성되면 민족주의 역시 자연스레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볼셰비키에서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자치권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하자, 그들을 맹렬하게 까기도 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대부분 코셔 식단을 따르는데, 트로츠키는 러시아식 돼지고기 햄을 즐겨 먹었으며, 스페인 억류 시절에 새우와 게도 먹는 등[* 유대인들은 해산물 중 비늘 없는 것은 먹으면 안 된다.] 정말로 유대인이라는 자각이 없었던 것 같다. 트로츠키의 부모님부터가 딱히 유대인이라는 자각이 없었으며, 집에서 종교적인 행사도 없었다고 한다. 즉 정교회나 유대교의 영향 하에서 유년기를 보낸 다른 볼셰비키 혁명가들과 달리, 태어나면서부터 종교가 없었다. * [[스탈린]]이 그리도 트로츠키를 죽이려고 한 게 [[유대인]]에 대한 [[음모론]]적 두려움에 빠져 그랬다는 주장까지 있다. 우습게도 스탈린의 몇몇 충신들 중에는 유대인도 있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를 비꼬는 이야기 중에 '부자들은 유대인 혁명가가 두려워서 유대인을 몰아내고 싶어하고, 빈자들은 유대인 자본가가 두려워서 유대인을 몰아내고 싶어한다'는 것이 있다. 소련 및 동구권에서도 이런 이중성에 의하여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의 반유대주의(및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를 소리높여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자국 내부에서 반유대주의적 차별행위를 벌인 사례가 많다. 하지만 초기의 소련 공산당은 상당히 명확한 '반유대주의 반대' 노선을 취하고 있었으며, [[하자르 칸국]] 멸망 이래로 딱히 뚜렸한 대형 행정구역조차 배당받은적이 없는 유대인들을 위한다고 [[유대인 자치주]]를 설치했을 정도였다. 냉전기 동구권의 반유대주의라고 하기에도 뭣한 게 이건 대전 후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아랍 사회주의]]가 성행하고, 중동 문제가 본격적인 미소 대결의 대리 전장 중 하나가 되고나서야, [[시오니즘]] 반대 노선을 타게 됐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박해한 적은 없다. 스탈린 생전 최후의 숙청이었던 유대인 의사 사건도 마침 본격적인 정치적 세력으로 떠 오르려고 하던 이스라엘 중심의 시오니즘 운동의 싹을 미리 자르려고 한 정치적인 숙청이었지, 인종적 의미에서 유대인을 박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탈린은 [[인도]] 등 탈식민국가들이 이스라엘 건국을 반대하고 있을때 홀로 이스라엘의 건국을 승인하기도 했다.[* 물론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의 대등한 연방 국가로서 이스라엘을 지지한 것이지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을 지지하는 의미에서 승인한 것은 아니긴 했다.] 그래서 스탈린이 반유대주의적 음모론에 입각해 트로츠키를 죽이려 들었다는 주장은 낭설이다. 트로츠키의 소련 복귀 시도와 복귀 의지는 스탈린이 위협감을 느낄 정도로 심대했고, 대숙청 이전에는 군부와 정보 기관에도 과거에 트로츠키를 지지했거나 비밀리에 트로츠키를 지지하는 중인 인사들이 많았다. 이런 정적을 그저 음모론 때문에 죽이려 했다는 것은 스탈린의 심각한 편집증을 고려하더라도 무리수에 가깝다. * 스탈린은 트로츠키에 대한 암살 시도 외에도 트로츠키가 망명생활 중에도 간직하던 트로츠키의 개인 원고와 편지 등을 모은 작은 도서관 분량의 문서고를 테러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트로츠키가 소유한 문서에는 기밀로 간주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도와 파급력이 높은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문서고를 안전하게 보관할 방법을 찾던 트로츠키는 죽기 한달 전에 러시아 혁명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고 있던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의 사서와 접촉해 자신이 죽은 후에도 동지들와 전직 동지들이 자신의 문서에 의해 스탈린에게 피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 40년동안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문서들을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했고, 이는 현재 하버드 대학교에 의해 Leon Trotsky Papers라는 이름으로 공개되어 있다. 공개되기 이전에도 트로츠키의 부인 등 트로츠키가 지정한 사후 문서 관리인들에 의해 허락을 받은 아이작 도이쳐와 같은 사람들은 이 자료를 참고자료로 사용해 책을 쓰기도 했다. * 스탈린이 정권을 잡고서는 일종의 유토피아주의적 레퍼토리를 내세울 때에, 해외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가 '사회주의 사회가 성경에 나오는 낙원과 같을지는 모르겠는데,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출처: 10월 혁명을 옹호하며(1932)]면서 이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한 것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스탈린의 경우에는 정교회 신학생 출신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낙원을 지상에 건설하자는 유토피아적 선전으로 대중들을 휘어잡아 제 발 아래 복속시키려 했던 반면, 트로츠키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무교였기 때문에 그런 것을 일종의 왜곡으로 받아들였고, 개인적 차원에서도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사상에 그런 유토피아주의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더욱 발전한 사회를 추구하는 차원에서 자본주의 다음 단계는 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 사회주의 사회가 어떠한 문제도 없고 고통과 눈물도 없는 완전한 이상향이 될 것이라는 내용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저작 어디에도 없다. 사회주의 사회 역시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변증법적으로 해체되어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 전망했으며, 공산주의 이후에 대해서조차도 '아직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입장이었지 결코 공산주의 사회가 인류 역사의 최종 단계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사회주의가 유토피아주의적 양상을 띠게 된 것은 스탈린 시기부터다. * 다만 스탈린이 내세운 유토피아적 레퍼토리야말로 권력 투쟁에서 스탈린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한 [[조르주 소렐|강력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는 해석도 있다. 트로츠키나 레닌이 주장한 복잡하고 모호한 미래상에 비해 신학생 출신이던 스탈린이 제시한 기독교적 천년왕국을 연상시키는 유토피아적 레퍼토리는 기독교(정교회) 신앙에 익숙한 러시아 대중들에게 쉽게 이해시킬 수 있었고, 이러한 지지세를 기반으로 당 내 영향력을 팽창시킨 스탈린이 결국 권력 투쟁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 트로츠키의 아버지는 부유한 농부였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과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고 현실세계에 눈 뜨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회고록에선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내 아버지는 러시아 내전 당시 당신의 아들이 트로츠키란 이유로 백군에게 탄압당하셨고 적군에게는 부농이란 이유로 비판당하셨다."] 어쨌든 부유한 환경 덕분에 트로츠키는 먼 곳에서 유학을 할 수도 있었고 [[대학]]을 갈 수도 있었다. 1905년 망명 이후 미국에서 꽤나 오랫동안 있었기에, [[대체역사물]]에서는 주로 러시아로 넘어가지 못하고 이 동네에 머무는 것으로 설정되기도 한다. 트로츠키의 학생 시절, 마침 공산주의자가 된 트로츠키가 집안에서 불온한 발언을 하자 자식의 장래가 걱정된 아버지는 '''"이 나라는 앞으로 천년은 더 갈 거다."'''고 경고하듯이 말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혁명에 성공한 후, 다시 아버지를 만난 트로츠키가 "아버지는 차르의 러시아가 천년은 갈 거라고 하셨죠?"라고 놀리듯이 말하자 아버지는 웃으며 "그럼 이젠 새로 세운 나라가 그만큼 오래가도록 하려무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트로츠키의 영원한 반대항인 스탈린에게도 비슷하지만 정반대인 일화가 있다. > 어린 스탈린은 초등교육을 받고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영향으로 보인다. 스탈린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신부가 되길 원했다. 스탈린은 최고 권좌에 오른 후에 [[조지아]]에 있던 어머니를 찾아갔었는데 정치에 대해 잘 모르던 그녀는 스탈린에게 "너 요즘 뭐하고 있니?"라고 물었다. 그러자 스탈린은, "어머니! 차르 아시죠? 전 차르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스탈린의 말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채 "그래? 유감이네.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신부가 되는 게 어떠니?"라고 말했고, 이후로도 가끔씩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물론 스탈린의 어머니가 세속적인 정치권력보다 종교적인 삶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면, 그 또한 존경받을 만한 삶의 태도겠지만, 혁명가이자 정치가로써 살기로 결심한 자식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트로츠키의 아버지가 스탈린의 어머니보다 훨씬 더 자식을 잘 이해했던 셈이다. 두 일화가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듯, 중세적인 환경에서 자라나고 교육받은 스탈린에 비해 트로츠키는 근대적인 환경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인물이었다. * [[사회주의노동자당(영국)|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발간하고 [[노동자연대]]에서 번역한 '삐딱이들을 위한 트로츠키 가이드'라는 소책자에 보면 트로츠키가 현재 성 2개 쓰는 [[여성주의자]]들처럼 두 번째 아내 나탈리아 세도바의 성과 자기 성을 같이 썼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트로츠키는 보통 자신의 글에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혹은 '레온 (다비도비치) 트로츠키'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나 당연히 트로츠키는 필명이고 법적 이름이 아니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부는 양성평등 정책을 시행해 현대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처럼 결혼한 부부가 남편과 아내 중 어느 쪽의 성이든지 따를 수 있게 했는데, 트로츠키는 이때 브론시테인이라는 본래 성을 완전히 버리고 자신을 포함해 가족들 전체가 부인의 성인 세도프를 따르게 했다. 그러므로 트로츠키의 풀네임은 혁명 이전에는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 혁명 이후에는 '레프 다비도비치 세도프'가 된다. 장남인 레프 세도프와 같은 이름이므로 만약 서유럽이었다면 장남은 레프 세도프 주니어라고 불렸겠지만 러시아에서는 부칭을 쓰기 때문에 풀네임이 구분된다. * 트로츠키는 젊을 적에 공산주의를 혐오했다. 대학생 시절에 정치 모임에서 토론을 하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공산주의가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이다'라며 깠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나 공산주의자 하기로 했음!" 이라고 선언하고는 그때부터 맹렬하게 공산주의를 옹호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래켰다고 한다. 그와 비슷하게 역시 공산주의자로서도 레닌을 초기에만 지지하다가 이후 결별하고 강력한 멘셰비키의 옹호자였으나, [[1917년]] 갑자기 돌변해 레닌의 철두철미한 지지자가 된다. 그래서 별명이 "레닌의 곤봉". 1905년에 레닌을 만난 곳도 러시아가 아닌 망명지인 [[런던]]. 말 그대로 세계를 누빈 사람이다. *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직후, 학생 신분으로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노동자와 학생으로 구성된 소규모 비밀결사를 만들어 지도자 노릇을 한 적도 있었다. 이 때 사용했던 가명은 '리보프'. 주 활동은 서유럽에서 들여온 사회주의 관련 소책자들을 번역하여 돌려읽거나, 주변의 친구들을 설득하여 새로운 조직원으로 포섭하는 것이었고, 공공 도서관의 이용요금 인상 반대운동처럼 유익한 활동도 했다고 한다. 결국 차르의 정치경찰에 검거되기는 했는데 경찰 쪽에서는 이 조직의 활동내역을 포착하고서도 고작 학생 주제에 결사를 만들어서 운영한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배후에 분명히 거물이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그 거물을 찾아내기 위해 한동안 내버려뒀다고 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잠시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후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정권을 잡은 후 리보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동지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과거 함께 활동하던 시절에 중년 노동자였던 이 동지는 트로츠키와 다시 만난 1920년 무렵에는 노인이 되어 있었지만, 비밀결사가 해산되고 트로츠키와 헤어진 이후에도 계속 열성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해왔고, 혁명기에도 상당한 활동을 해서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 양반은 젊은 시절의 벗 리보프 동지도 기억하고 혁명의 영웅 트로츠키 동지도 존경하고 있었지만 둘이 동일인물인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이 이야기를 남긴 후 "그리고 그 동지는 나중에 트로츠키가 반혁명분자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라고 뒷맛 씁쓸한 농담을 남겼다. * [[블라디미르 레닌]]과 더불어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아가리 파이터]]였는데, 실제로도 말싸움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공격적인 논객이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토론은 커녕 [[러시아어]]도 서투른 수준이었지만,[* 스탈린은 [[조지아]] 출신이었고 고향에선 시인이었지만 [[러시아어]]는 그리 잘 하지 못해서 러시아어로 말을 할 때면 되도록 짧게 했다고 한다. 실제로 남겨진 자료를 통해 분석한 스탈린의 러시아어 구사 능력은 대략 고등학생 정도 수준으로,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지만 언어를 주된 도구로 사용해야 하는 정치인으로서는 부족한 수준이었다고 여겨진다.] 트로츠키는 공격적이고 논리적인 어조로 상대방을 공격했다.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던 입배틀의 달인이자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기로 유명했던 레닌도 트로츠키의 공격적인 언사를 듣고는 바로 당황해서 트로츠키의 주장을 인정해준 적이 있을 정도. [[1905년]] 파업 때는 자기가 앞장서서 노동자들을 선동하기도 했다. 트로츠키는 못 배운 노동자들도 쉬운 말로 선동하거나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 고집이 엄청나게 세서, 한번 확신한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절대 꺾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고집어린 성격은 훗날 트로츠키가 권력을 잃고 목숨까지 잃은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레닌도 트로츠키의 이런 점을 굉장히 문제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레닌 눈에 트로츠키는 아마도 '매우 똑똑하지만 지나치게 오만해서 더 재수없는 놈' 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트로츠키가 그나마 존경을 표시한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가 레닌이었다. 다만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데 크게 거리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서, 군사최고인민위원(국방장관)으로써 트로츠키는 '전쟁은 군사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확고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몰락할 때까지 군사작전에 끊임없이 집적거리면서 전쟁을 말아먹었고, 스탈린도 2차대전 초반에 몇번 군사작전에 개입했다가 크게 데인 적이 있는데 비해 트로츠키는 러시아 내전 시기부터 특별히 사고치지 않고도 군사작전은 전문 지휘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 뛰어난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였지만, 막상 친화력은 그에 못미쳐 당내에서 세력을 크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뛰어난 [[정치인]]은 아니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본인보다 못나 보이거나 만만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조롱이나 막말, 비난을 서슴지 않아서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트로츠키를 능력이 뛰어나도 재수없는 밥맛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고, 그 만큼 트로츠키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러시아 혁명 당시 레닌 다음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큰 활약을 했지만 트로츠키가 다음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는데 실패해서, 결국 망명갔던 이유이기도 했다. 레닌이 죽자마자 트로츠키를 제외한 다른 고위 당원들이 합심해서 트로츠키를 몰아내는 일을 먼저 시작했을 정도이니 평소 그에게 이를 갈고 있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짐작 가능하다. * 내전기에 트로츠키가 담당한 역할은 자신의 특기를 살려 전선을 돌아다니면서 군대의 사기를 고양시키는 일종의 최선임 정치장교[* 통상적인 정치장교의 역할에서 감시역할을 뺀 것.]였다. 장갑열차를 타고 수천킬로미터에 걸쳐 뻗은 전선을 돌아다니면서 각 부대에 들려 연설하고, 기차에서 직접 신문을 제작해서 부대마다 배포하고 다녔다고. 사실 이것도 장관급 요인이 전선에 너무 접근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솔선수범으로써 당시 붉은 군대 내에서는 평판이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트로츠키 자신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트로츠키가 들린 부대마다 [[종점의 기적]]에 필적하는 열광적인 반응이 일어난 것 같지만 물론 다 믿을 수는 없다. 그래도 다른 기록들을 보면 당시 붉은 군대의 병사들은 최전선까지 찾아와서 자신들을 격려하고 가는 국방장관에게 상당한 호감을 느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닌게 아니라, 이때만 해도 볼셰비키나 다른 혁명 조직이나 아직은 청년들의 지하 혁명 조직 시절의 낭만주의적 자유로움은 조직 내부적으로나마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어서, 레닌을 비롯한 당 최고 지도층도 부각은 철저히 되었을 망정 개인적 언행에서 막무가네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고, 병사들도 아무래도 구 [[일본군]]마냥 썩을 대로 썩은 봉건적 문화가 그대로 남은 제정 군대를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나왔다 보니 오히려 계급간의 관계는 자유분방한 경우가 많았다. * 그가 권력을 잃은 후부터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말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수정주의자, 반동주의자를 의미하는 가장 심한 욕이자 한번 얻으면 평생을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시대에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등 과거의 고참 볼셰비키들이 복권되었지만 트로츠키는 결국 복권되지 못하였으며 소련과 별로 인연이 없던 [[중국]]이나 [[북한]] 등에서도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표현은 심한 욕설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 잘 묘사되어 있다. * 트로츠키는 소련이 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고 고르바초프도 집권 초기에 트로츠키를 비난했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1988년부터 소련이 자유화되면서 트로츠키의 저서들이 검열받지 않고 소련에서 출간되었고 멕시코에서 살던 트로츠키의 외손자가 소련을 방문하기도 했다. 트로츠키의 반스탈린 활동에 동조하지 않고 조용히 살다 [[대숙청]]으로 1937년 처형된 둘째 아들 세르게이 세도프는 1988년 복권되었다.[* 세르게이의 딸은 스탈린 시대에 살아남아 1979년까지 소련에서 살다가 1979년 소련이 유대인들의 이주를 허가할 때 출국 허가를 받아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미국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트로츠키의 외손녀(첫째 딸의 딸)도 스탈린 시대에 살아남아 흐루쇼프 시대에 복권되었다.] * 트로츠키는 멕시코로 망명 후 [[디에고 리베라]]와 그 아내인 [[프리다 칼로]]와 친하게 지냈고, 특히 [[도시전설]]에 의하면 프리다와 트로츠키는 영어를 전혀 모르는 디에고 앞에서 영어로 애정어린 대화를 하기까지 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하나, 이 프리다 칼로와 트로츠키의 연애설은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디에고 리베라의 바람을 계속 용서하던 프리다 칼로였지만, 자신의 친동생에게까지 손을 대자 그에 대한 반동으로 트로츠키와 사귀게 되었다'는 것은 2002년작 영화 <[[프리다(영화)|프리다]]>의 내용이고, 이 사건이 영화의 극적 연출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근거가 제시된 바 없다. 프리다 칼로와 트로츠키 모두 여러 편의 전기가 제작될 정도로 역사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인데, 정작 이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자료에서는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라는 주장이 제시된 바 없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의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중요한 것이 이 소문이 퍼진 형태인데, 영화 <프리다>의 내용과는 별개로 한국에서 이 소문이 처음 퍼진 형태는 '트로츠키가 자기 동지인 화가의 부인과 바람이 났었다'는 것이었다가 트로츠키의 동지였던 화가가 디에고 리베라라는 지적이 있은 후에 '트로츠키가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과 바람이 났었다'는 것으로 변하고,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이 프리다 칼로라는 지적을 받음으로써 최종적으로 '트로츠키와 프리다 칼로가 바람이 났었다'는 것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 점에서 현 시대에는 디에고 리베라보다 프리다 칼로의 지명도가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소문이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이라는 형태로 퍼진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차라리 1930년대 당시라면 디에고 리베라의 지명도가 더 높았으니 이런 식의 소문이 퍼질 수 있었겠지만, 이 소문이 퍼진 시기를 생각하면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마 [[요제프 멩겔레]]의 이야기가 와전된 듯 싶다. 멩겔레는 나치가 패망하자 신분을 숨기고 남미로 도주했는데 자신을 받아준 친나치인사의 부인과 불륜을 벌이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 * 해외에서 나치는 사라지지 않았고 [[아이언 스카이|달에는 나치의 비밀기지가 있다]]는 허무맹랑한 음모론과 비슷하게 트로츠키는 죽지 않았고 남극에는 [[트로츠키]]의 비밀기지가 있으며 트로츠키 선생님에게 훈련받은 평등한 펭귄들이 혁명 전사로써 [[황제펭귄]]을 몰아냈고 [[연속혁명론|전 세계를 공산화시키려 한다]]는, 음모론을 까기 위한 [[음모론]]이 존재한다. * 해당 음모론은 뜬금없이 2020년대 이후 인터넷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의 대체역사 모드 [[카이저라이히]]와 관련이 있다. 카이저라이히 세계관에서 트로츠키가 없는 것에 의문을 가진 유저들이 왜 트로츠키가 없냐는 질문에 제작진들이 별다른 설명을 내놓지 않자 팬들 사이에서 '''남극 가서 펭귄에게 혁명전술 가르치고 있음'''이라고 뜬금 없는 유행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밈화된 것이다. 물론 나중에 설정이 보강되면서 전사 처리되었다. *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1922년 모스크바를 들렸을 당시 트로츠키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그의 연설에 감명받아서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던 ‘모스크바의 인상’에서 트로츠키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